녹색당 과학기술위원회 정강수

기존 사회 질서에 변화를 일으킬만한 파급력을 지닌 기술이 등장할 때면 늘 해당 기술의 도입을 두고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일어나곤 합니다. 원자력의 발견, DNA 기술, 그리고 최근의 생성형 AI 등등. 이러한 논쟁에서 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기술/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옹호하는 목소리입니다. 즉 기술/과학 그 자체엔 가치 지향이 담겨있지 않고, 이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지요. 오늘 뉴스레터에서 소개해 드릴 글은 이 가치중립성에 관한 주장을 반박하며 이 ‘도구들’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경향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저 도구일 뿐’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There’s no such thing as Just a Tool) by Iris Meredith

기술에 대한 사회 비평 분야에서 일하거나 글을 쓴다면, 기술에 관한 매우 다양한 견해와 의견들을 듣게 된다. 그중 일부는 애초에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생각 자체에 놀라울 정도로 적대적이다. 그 결과, 당신은 자신의 작업, 아이디어, 관점에 대해 매우 다양한 비판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중 일부는 지극히 타당하고, 다른 일부는… 그다지 그렇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특정 기술을 비판할 때 흔히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은, 엔지니어들이 어떤 기술은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온갖 종류의 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 말을 듣게 된다. 셸(shell)1, 컨테이너화(containerisation)2, 리액티브 프레임워크3(reactive frameworks4),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LLM 기술에 대한 논의에서 특히 자주 등장한다. 이 반응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 논의되고 있는 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가진 태도나 이데올로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이다.
  • 논의되고 있는 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효과적으로 분리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사용하는 기술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기술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사용된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이 어떤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으며, 언제든 다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완전한 의지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
  • 기술은 그것을 이용해 어떤 종류의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어떤 행동 방식을 다른 행동 방식보다 더 장려하는 경향은 없다(“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이러한 진술들이 참이라는 데서 따라오는 결과는, 도구나 기술에 대한 유효한 비판은 그것이 수행하도록 설계된 과업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에 대한 비판뿐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도구가 나쁜 습관을 가르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명시적으로 교육용 도구가 아니라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논의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SUV를 운전하는 것이 도로에서 형편없는 운전 행동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논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국 SUV는 “그저 도구일 뿐”이고 그것에는 몇몇 정당한 사용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SUV가 이데올로기적이고 행동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실제로 논의하도록 허용되지 않는 무언가가 된다. 도구에 대한 이런 종류의 통속적인 이해는 매우 흔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거의 전부 틀렸다.

어떤 것이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왜 정당하지 않은 움직임인지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저명한 나치이자(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동시에 매우 중요한 20세기 철학자이기도 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작업에 의존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주요 저작인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은 주로 존재론과, 인간 존재가 죽음을-향한-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논하지만, 그곳과 다른 저작들에서 하이데거의 작업 중 상당한 부분은 도구의 본성과 존재에 관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도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도구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능력이 확장된 것을 나타내는 어떤 것(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를 가지는 어떤 것, 반드시 물체일 필요는 없다)이다. 따라서 도구란 그것이 없었다면 당신이 할 수 없었을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종류의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개념적 도약은, 도구가 잘 작동하거나 고장 나 있지 않을 때 그것이 하이데거가 “손에-익은(ready-to-hand)” 성질이라고 설명한 것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즉, 도구가 부여하는 추가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과 도구의 일종의 인간-도구 게슈탈트5가 형성되면서, 도구는 배경으로 사라진다. 이것의 간단한 예로 포크를 사용해 식사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포크가 잘 설계되어 있고 고장 나 있지 않을 때, 저녁을 먹으면서 당신은 의식 속에 명시적으로 ‘나는 포크를 사용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그저 먹는다. 그리고 포크를 가지고 어떻게 먹는지, 그리고 포크를 가지고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에 내재한 전제들은 배경으로 사라지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신은 포크가 작동하지 않을 때만 포크를 명시적으로 알아차린다. 아마 포크의 갈퀴 하나가 휘어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수프를 먹으려고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말하면, 도구는 그것이 거슬리게 되거나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데 장애물이 될 때에만 “눈앞에-있는(present-at-hand)” 것이 된다.

그러나 손에-익은 도구와 함께 형성되는 인간-도구 게슈탈트는 중립적이지 않다. 오히려 손에-익은 각각의 도구는 서로 다른 게슈탈트를 만들어내며, 각각은 서로 다른 범위의 허용 가능한 그리고 잠재적인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지며,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사고 패턴, 아이디어,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동반한다. 예를 들어 포크를 보자. 개념적으로 그것은 “그저 도구일 뿐”이며, 따라서 중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은 정말, 정말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한 예가 필요하다면, 앵글로·색슨 배경을 가진 나이가 좀 많거나 문화적으로 다소 고립되어 살아온 사람들을 찾아보라(당신이 사는 곳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면, 당신이 있는 곳의 다른 음식 문화 출신 사람들로 대체하라). 그리고 그들을 쓰촨 음식점에 데려가라.

이렇게 표현하면 요점은 꽤 명확하다. 나이프와 포크를 가지고 먹는 것이 허용하는 행위 가능성(affordances)6은 젓가락으로 먹을 때 가지는 행위 가능성과 상당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 번째로, 음식이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에 내재한 전제들이 완전히 다르다. 젓가락으로 먹는 손님들에게 유럽식으로 스테이크를 제공할 수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음식은 젓가락으로 쉽게 집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잘려야 한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요리가 준비되는지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많은 쓰촨 음식이 터무니없이… 음, 불공평한 평판을 얻게 된 상황처럼 말이다. 그냥 이 맛있는 충칭 라쯔지(Chongqing Laziji)의 사진을 한번 보라.

인간-포크 게슈탈트에게 이것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고추다. 설령 당신에게 그 모든 매운맛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매운맛 내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제시된 고추는 여전히 건조하고 먹기에 다소 불쾌하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인간-포크 게슈탈트가 만들어낼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젓가락 게슈탈트는 젓가락으로 고추 사이를 뒤적이고, 살짝 매콤해지고 향긋해진 닭고기 조각들을 골라내고, 그냥… 대부분의 고추를 피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우리의 충칭 라쯔지는 실제로 꽤 훌륭한 요리를 정당하고 어느 정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된다. 극단적으로는, 이렇게 서로 다른 행위 가능성들이 너무 멀리까지 나아가 실제로 그 게슈탈트들로 하여금 무엇을 아예 음식이라고 여기는지에 대해서조차 서로 다른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음식에 관한 한, 이것은 대부분 요리 문화에서 흥미로운 차이들로 이어진다(물론 이것이 인종차별과 그 밖의 그러한 불쾌한 것들이 자라기 좋은 토양이라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도구들의 경우에는… 음,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인간-자동차 게슈탈트는 삶을 경험하며, 인간-자전거 게슈탈트, 인간-기차 게슈탈트, 심지어 어떤 이동 수단도 갖지 않은 맨몸의 인간과도 상당히 다른 의견을 가진다. 운전자에게 가능한 것과 바람직한 것은, 같은 인간이 자동차 바깥에 있을 때 가능한 것 또는 바람직한 것과 비교해도 상당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일이 개별적인 경우에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로드 레이지(road rage)7라고 부르고, 정책의 규모에서는 자전거 도로가 그들이 자동차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순간에는 그들에게 이익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전거 도로에 극도로 화를 내는 것과 같은 일로 이어진다. 인간-자동차 게슈탈트는 그 게슈탈트 안의 인간과 분리된 이해관계와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종종 인간의 이해관계와 의견에 반대되고, 게슈탈트의 인간 부분 위에 그것들을 관철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인간-총 게슈탈트, 즉 “총-인간(gun-man)”이 있다. 어떤 사람의 손에 총을 쥐여주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들에게 이용할 수 있으며 좋아 보일 수도 있는 잠재적 행동들의 범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미국의 치안 활동이다. 당신이 총을 가지고 있을 때, 인간-총 게슈탈트의 일부로서 당신은 총을 쏠 이유를 찾도록 성향이 기울어진다. 평소라면 폭력 없이 해결될 수 있었을 상황들이 총격으로 확대된다. 총이 제공하는 행위 가능성 때문이다. 위협과 자기 뜻대로 하라는 요구가 협상과 타협보다 우선하게 되고, 잠재적인 위협들이 세상 속에서 전경으로 떠오르며,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기 어렵게 그리고 조금씩 동료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당신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적인 대상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분명히, 어떤 것도 결코 “그저 도구일 뿐”이지 않다. 아마도 고장 나 있거나 방해가 되는 도구라면 예외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기술 산업이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충분하다. (이 다음절에서 React와 Vue라는 웹개발 프레임워크를 예로 들어 도구에 잠재되어 있는 경로지향성을 설명하지만, 웹개발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번역에서는 생략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원문을 확인해주세요.)

그래서, 무언가가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 모든 이야기를 마쳤으니, 이제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무언가가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어 있는가? 도구가 자신이 일부가 되는 게슈탈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따라서 그 게슈탈트의 인간 부분이 지니게 되는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고려하면, 어떤 것이 도구일 수는 있지만, 공교롭게도 도구는 실제로 정말,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기술 업계에 있는 우리는 대체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도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종류의 도구를 만드는지에 대해 매우,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번영과 사회적 조화를 뒷받침하는 게슈탈트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는 도구를 만들어야 하며, 만약 이 둘이 균형을 이룰 수 없다면, 둘 모두에 대한 필요를 서로 간에 그리고 다른 고려 사항들과 함께 신중하게 균형 잡는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업계는 그 생각과는 상당히 반대로, 이 두 가지 모두에 파괴적인 도구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서로 고립시키고 대규모 허위 정보 확산의 매개체가 되어버린 소셜미디어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사기와 기만을 가능하게 한 암호화폐를 만들었다. 우리는 최악의 종류의 편견을 강화하는 분류 알고리즘8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론, 빌어먹을 LLM9들이 있다. 그것들은 이 모든 것을 하고, 그 밖에도 온갖 다른 사악한 짓을 한다.

LLM은 특히 중요한 사례다. 우리는 도구의 사용이 몇몇 매우 이상한 게슈탈트를 형성하는 것을 꽤 직접적으로 볼 수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 우리는 이것을 AI 정신병(AI psychosis)10이라고 부른다. 그 게슈탈트는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것과 너무나 크게 어긋나는 태도, 이데올로기, 심지어 세계에 대한 인식까지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질병이라고 이름 붙인다. 분명히 이런 것을 관찰하면서, 그 도구가 사실상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 경험, 그리고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극적으로 형성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설명한 현상은 분명히 실제로 일어나며, 만약 이 하나의 도구에서 그것이 이렇게 극적이고 명백하게 일어날 수 있다면, 훨씬 더 넓은 범위의 기술들에서 더 미묘하고 더 광범위한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나쁜” 도구가 좋고 유익한 일에 사용된 수많은 사례를 지적할 것이다. 내가 해롭다고 생각하는 프레임워크와 언어들도 많은 좋은 일을 해낸 도구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왔다. 지금까지 LLM 역시 꽤 많은 유용한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젠장, 나조차도 직접 시도해 봤을 때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타당한 주장들이다. 하지만 게슈탈트라는 틀에서 보면, 그것들이 실제로 요점을 반박하지는 않는다. 어떤 도구가 좋은 일에 사용될 수 있고, 사실상 그것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그것이 조장하는 관점은 우리가 장려해서는 안 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결국 온갖 종류의 흥미로운 무기 시스템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은 좋고 또한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지도자들이 폭탄과 포병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의 영향이나, 개인들이 총기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의 영향이 다른 조건이 모두 같을 때(ceteris paribus11) 해롭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총을 들고 다니거나 SUV를 운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당신을 인간의 생명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반사회적인 개자식이 되는 쪽으로 더 기울게 할 것이며, 물론 이 경향에 맞서 싸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만, 이러한 도구들의 게슈탈트가 지닌 논리는 여전히 나쁜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이는 예를 들어 당신이 LLM을 사용해 당신의 비영리단체가 일을 잘하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실제로 어떤 생성 코드가 배포되는지에 대해 매우 주의하더라도(심지어 문자 그대로 모든 코드 한 줄 한 줄을 읽는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매 단계에서 당신의 게슈탈트, 따라서 당신의 태도와 이데올로기를 부주의함과 엉성함 쪽으로 밀어붙이는 그 도구의 손에-익은(ready-to-hand) 본성과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런 선택이 절대로 옳은 선택이 될 수 없다거나, 그 도구를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총이 일반적으로 사람의 태도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면서도 침략군에 맞서 싸우는 것은 대체로 지지한다. 하지만 음… 그런 도구를 사용할 것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과 그것에 대해 매우 조심하는 것은 당신에게 요구되는 의무다. 장기간 사용하면 그것이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분명히 바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그건 그렇고, 정규군은 총기와 관련해서 이런 종류의 완화책에 꽤 많은 노력을 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경찰 조직은 흔히 그렇지 않다는 것은 흥미로운 관찰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타협은 가능한 한 드물게 하는 것이 좋으며, 당신이 마주한 문제가 그런 종류의 타협을 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극도로 심각할 때만 그런 타협을 하는 것이 좋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뿐이라면(가령 React와 Vue가 인간의 손에 의해 전혀 변경되지 않은 채 자연에서 발견한 것들이라면), 이것은 도구와 기술 전반에 관한 불행한 사실로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도구들을 만든다. 기술 분야에서 어떤 도구든 개발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 어떤 종류의 행위 가능성을 제공할지, 어떤 게슈탈트를 형성할지에 대해 결정한다. 우리는 단지 어떤 타협을 할지 선택해야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업계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에게 어떤 타협이 가능한지를 대체로 규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체적으로 꽤 나쁜 선택을 해왔다. 세상에 깊은 해악을 끼치는 선택들이었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그 결과 속에서 대체로 살아가고 있는 선택들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기술 업계 사람이 무언가가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것을 우리가 업계로서 세상에 무엇을 내놓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책임지기를 꺼리는 태도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도구는 기술 세계의 상당 부분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중립적이고 분리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 하물며 그 도구에 영향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단지 그 도구를 잘못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한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더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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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셸(shell) — 컴퓨터에 명령어를 글자로 직접 쳐서 시키는 화면. 영화에서 해커가 검은 배경에 흰 글씨를 두드리는 그 화면이 셸입니다. 마우스로 아이콘을 클릭하는 방식과 대비되는 조작 방식입니다. ↩︎
  2. 컨테이너화(containerisation) — 프로그램을 실행에 필요한 부품까지 통째로 싸서 하나의 상자로 만드는 기술. 이삿짐을 박스째 옮기면 어느 집에 가도 그대로 풀 수 있듯이, 개발자 컴퓨터에서 돌던 프로그램을 다른 서버에서도 똑같이 돌게 해줍니다. ↩︎
  3. 프레임워크(framework) — 프로그램을 만들 때 쓰는 반쯤 지어진 뼈대. 집을 지을 때 기둥과 골조가 이미 서 있고 개발자는 그 위에 방을 채워 넣는 식입니다. 어떤 뼈대를 고르느냐에 따라 지을 수 있는 집의 모양이 달라지는데, 이 글이 말하는 ‘도구의 경향성’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
  4. 리액티브 프레임워크 / React·Vue — 위 프레임워크 중 웹사이트 화면을 만드는 데 쓰이는 대표적인 두 제품 이름. 원문에서 저자가 “도구마다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예로 든 대상입니다. ↩︎
  5. 게슈탈트(Gestalt) — 부분을 더한 것과는 다른 하나의 덩어리. 이 글에서는 ‘사람 + 도구’가 합쳐져 원래 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주체가 된다는 뜻으로 씁니다. 인간-자동차 게슈탈트는 ‘운전대를 잡은 상태의 사람’이고, 그 사람은 걸어 다닐 때와 다른 판단을 내립니다. ↩︎
  6. 행위 가능성(affordance) — 어떤 물건이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권하는 행동. 손잡이는 당기게 하고 평평한 판은 밀게 합니다. 젓가락은 잘게 썬 음식을, 포크와 나이프는 통째로 나온 고기를 부릅니다. ↩︎
  7. 로드 레이지(road rage) — 운전 중 사소한 일에 과격하게 분노하는 현상. 평소 온순한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달라지는 그 상태입니다. ↩︎
  8. 분류 알고리즘 — 사람이나 사물을 자동으로 등급·유형으로 나누는 컴퓨터 규칙. 대출 심사, 채용 서류 자동 선별, 재범 위험도 예측 등에 쓰이며, 과거 데이터에 담긴 차별을 그대로 학습해 되풀이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
  9. LLM(대규모 언어 모델) — ChatGPT나 Claude 같은 생성형 AI의 본체. 엄청난 양의 글을 학습해서 다음에 올 말을 확률로 예측하는 방식으로 문장을 만들어냅니다. ↩︎
  10. AI 정신병(AI psychosis) — 정식 의학 진단명은 아니고, 챗봇과 오래 깊이 대화하다 현실 감각이나 판단이 뒤틀리는 현상을 가리키는 최근의 표현입니다. ↩︎
  11. ceteris paribus —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이라는 뜻의 라틴어. 경제학·논리학에서 한 요인만 떼어내 비교할 때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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